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행위. 그것이 쌓여 숲이 되고, 요새가 된다. 프레카리아트를 자처하는 화가 윤겸이 불안 속에서 평온을 짓는 방법.
손이 움직인다.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선 하나. 그 옆에 또 하나. 그 옆에 또 하나. 선은 줄지어 붙고, 겹치고, 번진다. 어느 순간부터 선은 형상이 된다. 숲이 되고, 요새가 된다. 윤겸의 그림은 그렇게 태어난다.
선이 숲이 되는 방식
윤겸은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다. 이 행위가 그림을 만드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선을 그리는 행위는 세상을 불완전하게 볼 수 없는 나를 보여준다." 완벽하게 보지 못하면 그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선을 긋고 또 긋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을 불완전한 채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고백이다.
〈GreenForest〉 연작은 그 반복이 쌓여 탄생한 결과물이다. 안료가 층층이 올라가면서 캔버스 위에 초록의 밀도가 생긴다. 빛이 달라지면 숲의 질감도 달라진다. 같은 그림을 아침과 저녁에 다르게 보는 일. 그것이 윤겸의 의도다.

〈GreenForest (2)〉에서 초록은 더 짙어진다. 〈GreenForest(3)〉에는 형상이 스친다. 인물인지 식물인지 경계가 흐릿하다. 그 모호함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
'아스라이'는 우리말로 '희미하고 아득하게'라는 뜻이다.

〈아스라이〉와 〈아스라이 ll〉에서 형상은 배경에 녹아든다. 경계를 붙잡으려 할수록 더 흐려진다. 이것이 아스라이라는 말이 가진 감촉이다. 선을 긋는 동안 윤겸은 스스로를 잊는다고 말한다. 무아(無我)라고 불러도 좋다. 그 상태에서 선은 가장 자유롭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그림을 찾는 방법이다.
요새를 짓는 사람
윤겸은 자신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 부른다. 불안정한 노동자. 확실한 소속도, 예측 가능한 수입도 없는 삶.
그런데 요새를 짓는다.

Fortress 연작의 영감은 자연에서 왔다. 동물과 곤충이 위장과 적응으로 스스로 요새를 만들어내는 방식.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견고한 집이 없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몸을 숨기고, 버티고, 조금씩 더 두꺼운 껍질을 만들어간다.
〈Green fortress〉의 색은 생존의 색이다. 〈Pink fortress〉의 분홍은 그것이 동시에 꿈의 색임을 말한다. 방어만을 위한 요새가 아니다.
"나의 요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빛을 향해 다가가는 미확정의 요새이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불안정한 자가 불안정한 자에게
씨앗페에 참여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윤겸 스스로 불안정한 삶을 알기에, 같은 자리에 선 예술인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수치가 아니라 주변의 현실이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은 작품을 내놓아 상호부조 기금을 만든다.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불안정한 노동자가 또 다른 불안정한 노동자를 돕는 구조. 프레카리아트끼리의 연대.
윤겸의 요새가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유다.
선은 계속된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윤겸의 손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선 하나. 그 옆에 또 하나. 그것이 쌓여 숲이 되고, 요새가 되고, 결국 어떤 사람의 안식처가 된다. 빛을 향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윤겸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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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