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하면서도 따뜻한 시선. 김규학은 사라져가는 고향 풍경과 눈 온 날의 들판에서 희망과 절망이 하나의 몸체에 담겨 있다는 것을 그린다.
들판 끝으로 빛이 기울었다.
한적한 시골길. 아무도 없는 마을 어귀. 그 적막 속에서 바람이 지나간다. 김규학의 그림은 그 바람의 흔적을 잡는다.
고향이라는 이름의 시간
김규학은 어린 시절의 고향 기억을 그린다.
꼭 아름다운 기억만은 아니다. 한적하고, 때로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러나 그 적막 속에 따뜻함이 있다. "한적한 시골 풍경과 어린 시절의 고향 기억을 적막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인천in이 그의 작업을 소개한 문장이다. 이 한 문장이 시리즈 전체를 담는다.
작품명은 '바람과 빛'. 그것이 고향 풍경에서 남는 것들이다. 건물도 사람도 아니라 바람과 빛.
눈 온 날
차가운 바람을 타고 밤사이 내린 눈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바람과 빛-127〉에는 작가의 노트가 달린다. "대충 옷을 걸치고서 커피 한잔을 들고 너른 들판에 펼쳐진 하얀 세상을 마주하고 앉는다." 일상의 장면이다. 그러나 그 시선 끝에서 "꿈과 희망에 대한 미련, 편하지만은 않은 삶의 지나온 흔적들이 눈 덮인 하얀 세상 속에 묻힌다."
"겨울은 절망의 계절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희망과 절망은 하나의 몸체에 담겨 있어 희망은 절망을, 절망은 희망을 품는다." 이것이 김규학이 풍경에서 읽는 철학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그림
시리즈의 번호는 높아질수록 더 무거워진다.

〈바람과 빛-57〉에는 붉은 황토 흙더미와 펜스가 나온다. 사람이 살던 동네가 개발의 명분으로 비워진 자리. "인적이 없는 무너진 집 더미 주변에 전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의 문패만 덩그러니 걸려 있다." 김규학은 쓴다. "나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을 떠올리며 좋아진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 질문이 '바람과 빛' 시리즈의 핵심이다.

2021 아시아프(ASYAAF) 참여. 국립현대미술관, 인천미술은행 소장. 기억을 담은 그림이 공공의 공간에 걸린다.
기억하는 것이 연대가 된다
씨앗페에 작품을 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일. 개발과 현대화 속에서 지워지는 것들에 눈을 주는 일.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지워져가는 현실이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상호부조 기금을 만든다.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동료 예술인의 삶도 기억하는 것. 김규학의 방식이다.
바람은 계속 분다
들판 끝으로 다시 빛이 기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 없음 속에 모든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았던 기억. 고향이 남긴 온기. 눈 속에 묻힌 희망과 절망. 김규학의 그림은 그 없음을 오래 바라본다.
김규학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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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