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불안과 소외를 담는 여행가방, 그리고 그 안에 품은 회복의 풍경. 안은경의 캔버스는 떠남과 멈춤의 경계에서 피어난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는 자기만의 빈 가방 하나쯤은 있다.
안은경은 그렇게 말한다. 그녀의 캔버스 위에는 여행가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단순히 짐을 옮기는 도구가 아니라,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를 담는 심리적 안식처로서.
서울-울산-뉴욕-도쿄의 궤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는 울산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경성대·조선대·울산대에서 강의를 해왔고, 울산문화예술회관·울산대학교·울주세계산악영화제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울산과 서울을 축으로 한 그녀의 활동은 2007년 도쿄 Gallery Spacs pause에서 《일탈 속 즐거움》을 열며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Gallery HOSI에서 《Joy of Voyage》 초대전을 열었다. 2014년에는 뉴욕 ARPNY(Artist Residency Program, New York) 레지던시에 참여했고, 2015년과 2016년 연속으로 뉴욕에서 《The Journey to The Recovery》 초대전을 열었다. Caffebene Time Square, The Wheel House — 장소 이름부터 이동의 기호다.
여행가방이라는 심리적 지도

안은경의 작업에서 여행가방은 표면부터 다르다. 캐리어 표면의 화려한 색채와 패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내가 통과해 온 시간과 감정의 결이 스며든 또 하나의 이상적인 풍경이자 희망적인 메시지." 작가의 말이다.
삶의 무게는 때로 고단하지만, 가방 속을 채운 시각적 요소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긍정적인 에너지와 존재의 가치를 담는다. 그녀의 캔버스는 짐의 기록이 아니라 지도다.
쉼표(,) — 멈춤의 미학
2024년 개인전 《반추(反芻) Rumination》(가기갤러리, 울산), 2022년 《바운더리(Boundary) 여행》(북구문화예술회관, 울산). 전시 제목 자체가 '되새김질'과 '경계' 같은 동사와 명사 사이의 자리를 가리킨다. 여행은 이동이지만, 동시에 멈춤이기도 하다.

씨앗페 2026 출품작 〈쉼표(,)〉에서 자전거는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선 상태로 놓여 있다. 강렬한 붉은 색면은 감정이 응축된 심리적 상태를, 그 아래 푸른 공간은 감정이 서서히 풀리며 확장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두 색면의 경계 위에 놓인 자전거. 이동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멈춤 속에 담긴 가능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씨앗페에 내놓은 다섯 점
안은경은 씨앗페에 다섯 점을 내놓았다.


모두 장지 위에 혼합재료로 그려진 작업들이다. 동양화의 장지라는 물성이, 현대인의 여행가방이라는 소재를 만나는 자리.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이 만드는 상호부조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만드는 '회복의 시간'이, 씨앗페에서는 '회복의 자금'이 된다. 관객이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신만을 향해 떠나는 시간을 경험하기 바란다는 작가의 바람은, 다른 예술인에게 건네지는 저금리 대출의 숨통과 닮아 있다.
자기만의 빈 가방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궤도 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안은경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언제든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는 자기만의 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 가방 속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결국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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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페
발행 2026-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