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는 단순히 '한국의 옛날 그림'이 아니다. 한지, 먹, 분채, 석채라는 재료와 여백의 미학은 오늘을 사는 작가들의 손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난다. SAF 2026에 출품된 한국화 25점을 통해 전통 재료가 현대적 감수성과 만나는 순간을 들여다본다.
한국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 먹과 분채로 그리는 지금
"한국화요? 산수화나 화조도 같은 거 아닌가요?"
절반은 맞다. 절반은 틀렸다. 한국화는 재료와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지, 특정 주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한지에 먹으로 독수리를 그려도 한국화고, 염색한 한지 위에 분채로 책꽂이를 그려도 한국화다.
한국화란 무엇인가 — 재료에서 시작하는 차이
서양화와 한국화의 차이는 물감의 종류에서 비롯된다.
서양화는 유화나 아크릴처럼 기름이나 합성 수지에 안료를 섞는다. 반면 한국화는 자연에서 온 재료를 쓴다.
주요 재료들
- 한지·화선지: 닥나무로 만든 종이. 두꺼워서 먹이 번지는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질기면서도 숨 쉬는 재료다.
- 먹(墨): 그을음과 아교를 굳힌 막대. 물에 갈아서 쓴다. 농도에 따라 수십 가지 검정이 나온다.
- 분채(粉彩): 광물이나 조개껍데기를 곱게 갈아 아교에 개서 만든 안료. 발색이 맑고 오래간다.
- 석채(石彩): 천연 광물을 갈아 만든 안료. 분채보다 입자가 거칠고 질감이 있다.
- 수간분채: 물에서 씻어(수비·水飛) 고운 입자만 골라낸 분채. 더 맑고 정제된 색이 나온다.
이 재료들이 만드는 화면은 서양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빛이 재료 속에 흡수되어서 차분하고 은은한 느낌이 난다.
SAF 2026 한국화 25점 — 실제 작품으로 보는 재료의 세계
SAF에 출품된 한국화 25점을 보면 같은 '한국화'인데도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다.
이문형 작가는 책거리x쿠사마야요이, 책거리x앙리 마티스처럼 한지 위에 수묵채색으로 전통 책거리 도상에 현대 미술가들의 이미지를 겹쳐 넣는다. 조선의 책장 그림이 야요이 쿠사마나 마티스를 만나는 충돌이다.

신예리 작가는 다른 방식을 쓴다. 책거리(2020)는 염색한지 위에 분채, 야형화접도(夜螢花蝶圖)(2023)는 먹 염색한 한지 위에 분채를 썼다. 한지 자체를 먹으로 물들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올린다. 배경 자체가 이미 재료의 표현이 되는 방식이다. 취도(鷲圖)(2025)는 111x65cm 크기의 대형 화면에 염색한지 위에 분채로 독수리를 그렸는데, 가격은 ₩5,000,000이다.
서공임 작가의 영웅은 한지에 수간분채를 썼다. 수간분채는 정제 과정이 추가되어 더 맑고 고운 색이 나온다.
조이락 작가는 양귀비(한지에 석채), 복주머니(핑크), 복주머니(블루)(한지에 채색)처럼 전통 소재를 현대적 색감으로 재해석한다. 석채의 거친 입자감이 꽃과 민화 이미지에 독특한 질감을 더한다.
우용민 작가의 병오마 1(2026)은 71x36cm 한지에 먹으로 말을 그렸다. 가격은 ₩700,000. 순수한 수묵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천 김성태 작가는 매화와 이 해 너 해 두 점을 출품했는데, 화선지에 먹과 채색을 써서 전통 사군자의 세계를 이어간다.
여백(餘白)의 미학 — 비운 것이 더 말한다
한국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공간이다.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서양화와 다르게, 한국화는 의도적으로 비운다.
이것이 여백(餘白)의 미학이다.
비워진 공간은 허무함이 아니다. 그려진 것의 의미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공기 같은 역할을 한다. 수묵화에서 먹이 번지며 만드는 농담(濃淡)의 차이, 그리고 그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 — 그 사이에서 감상자의 마음이 작품과 대화를 시작한다.
동양 미학에서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수묵화 · 채색화 · 민화 — 한국화 안의 하위 장르
한국화는 하나가 아니다.
- 수묵화: 먹 하나만으로 그린다. 색이 없어도 농도 변화로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한다. 우용민의 말 그림이 여기에 해당한다.
- 수묵채색화: 먹으로 기본 구조를 잡고 채색을 더한다. 이문형의 책거리 연작이 이 방식이다.
- 채색화: 채색이 주가 된다. 조이락의 꽃 그림들이 여기 속한다.
- 민화: 조선 시대 민간에서 유행한 그림. 책거리, 화조도, 십장생 등이 소재다. 신예리의 작업이 민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잇는다.
왜 지금 한국화인가
한국화 재료는 느리고 불편하다. 먹을 직접 갈아야 하고, 분채는 아교에 개야 하고, 한지는 서양 캔버스와 다르게 번진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지금 시대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빠르고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 찬 환경에서, 느리게 만들어지는 그림이 전달하는 것이 있다.
신예리가 한지를 직접 먹으로 염색하고 그 위에 분채를 올리는 행위. 이문형이 전통 도상에 현대 미술가를 불러들이는 실험. 이런 작업들은 재료의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지금을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을 담아낸다.
재료가 변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는 계속 변한다. 그래서 한국화는 지금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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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페
발행 2026-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