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콘텐츠로 이동

디지털과 옻칠의 만남: 현대 미술의 경계 확장

미술 산책 · 발행 2026-04-09 · 씨앗페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올리는 것만이 미술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 SAF 2026 출품작 354점 중 21점이 디지털아트와 혼합매체로, 이 작품들은 '예술의 재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정채희 작가의 디지털 프린트 위 옻칠·난각·자개 작업은 그 가장 선명한 사례다.

예술의 재료, 어디까지 허용되나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현대 미술을 마주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게 예술이야?" 벽돌 더미, 형광등 하나, 텅 빈 캔버스. 그걸 앞에 두고 당혹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당혹감이 바로 현대 미술이 원하는 것이다.

"예술의 재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선언이 등장한 건 20세기 초반이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신문지 조각과 악보를 캔버스에 붙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재료의 경계는 무너졌다. 콜라주라 불린 이 기법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었다. 물감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실제 세계의 파편'으로 직접 가져오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이후 100여 년이 흐르면서, 예술가들이 가져온 재료는 점점 더 넓어졌다. 공장 폐기물, 자신의 피, 소리, 그리고 오늘날엔 픽셀. 디지털 데이터가 예술 재료가 된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SAF 2026의 21점 — 경계에 선 작품들

SAF 2026에 출품된 354점 중 혼합매체 작품은 11점, 디지털아트는 10점이다. 합쳐서 21점, 전체의 약 5.9%다. 숫자만 보면 작은 비율이지만, 이 21점이 전시에서 가장 많은 질문을 끌어내는 작품들이다.

디지털아트 쪽에선 림지언 작가의 Digital painting 연작이 눈에 띈다. 「풀, 꽃!」(2025), 「모먼트」(2025) 등 72.7×50cm 크기의 화면에서 물감 터치의 질감과 색채 농도를 구현했다. 손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도구는 태블릿과 펜슬이다. 이것이 회화인지 디지털아트인지 묻는 질문 자체가, 이미 낡은 범주를 드러낸다.

림지언, 〈진달래진달래〉, 2018, Digital Painting
림지언, 〈진달래진달래〉, 2018, Digital Painting

김태균 작가의 「Ornament #3」(2013)은 서울과 평양 두 도시의 입체교차로 사진들을 디지털로 콜라주한 작업이다. 100×100cm 크기에 '디지털 프린트, 디아섹' 마감. 디아섹은 인화된 사진 위에 아크릴 유리를 진공 압착하는 기법으로, 색상을 더 선명하게 살리면서 내구성도 높인다. 사진인가, 회화인가, 조각인가. 어느 하나로 분류되길 거부하는 작품이다.

정채희의 '옻사과' — 디지털 위에 3000년 기술을 올리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도발적인 재료 실험은 정채희 작가의 「옻사과」(2018)다. 65×70cm 크기의 이 작품에 표기된 재료는 이렇다.

디지털프린트에 옻칠, 난각, 자개

풀어 쓰면 이렇다. 먼저 디지털 이미지를 인쇄한다. 그 위에 옻나무 수액을 정제한 옻칠을 얹는다. 달걀 껍데기를 잘게 쪼개 붙이는 난각(卵殼) 기법, 그리고 조개껍데기를 갈아 박는 자개 장식까지. 현대의 인쇄 기술과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공예가 같은 화면에 공존한다.

디지털 프린트는 재현 가능하고 복수로 존재한다. 그 위에 손으로 직접 칠하는 옻칠과 자개는 단 하나의 물리적 흔적을 남긴다. 작품 가격 380만 원. 이 작품 하나에 디지털 복수성과 공예적 유일성이 동시에 담겨 있다.

원본이란 무엇인가 — 디지털 시대의 오래된 질문

디지털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 한동안 저평가됐던 이유가 있다. "복사할 수 있잖아요." 물리적 원본이 없다는 것, 무한히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 가치를 훼손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논리대로라면 판화는 예술이 아니었어야 했다. 렘브란트도 판화를 했고,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도 같은 이미지를 수십 장 찍어냈다. 에디션(edition), 즉 한정 수량 개념이 있는 이유다. SAF 2026 디지털 작품들 중 상당수가 '에디션 1/5', '에디션 4/10' 표기를 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렌티큘러 기술을 쓴 작품들은 복수성의 문제를 더 흥미롭게 비튼다. 렌티큘러는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바뀌는 렌즈 기반 인쇄 기술이다. 같은 작품을 보면서 왼쪽에 서면 A 이미지, 오른쪽에 서면 B 이미지가 보인다. "원본이 하나다"는 것은 맞지만, 그 하나 안에 두 개의 이미지가 산다.

박은선, 〈Double Existence & Space〉, 2025, Lenticular
박은선, 〈Double Existence & Space〉, 2025, Lenticular

혼합매체, 피카소에서 NFT까지

혼합매체(Mixed Media)라는 용어 자체는 20세기 초 피카소의 콜라주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은 훨씬 넓다. 심모비 작가의 「9407 SIM_Visibility」는 재료를 이렇게 표기한다.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기존 미디어 위에 아크릴을 쌓는 방식이다.

이런 혼합의 역사를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시대재료 실험대표 사례
1910년대신문지·악보 콜라주피카소, 브라크
1950~60년대쓰레기·산업 폐기물로버트 라우센버그
1990년대영상·설치·퍼포먼스백남준
2000년대디지털 프린트·사진다수
2020년대NFT·블록체인 인증비플(Beeple) 등

각 시대마다 "이게 정말 예술이냐"는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 경계는 넓어졌다.

전통과 디지털이 만나는 이유

정채희 작가가 디지털 프린트 위에 굳이 옻칠을 올리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이런 질문 때문일 것이다. 디지털로 재현된 이미지가 과연 '물질'을 가질 수 있는가. 스크린을 벗어나 손에 잡히는 무게와 촉감을 가질 수 있는가.

옻칠은 건조하면서 산화되고 굳어진다. 그 과정이 느리고 불확실하다. 같은 온도, 같은 습도에서 작업해도 결과가 매번 조금씩 다르다. 자개는 빛의 방향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이 변수들이 디지털의 완벽한 재현성과 충돌하면서, 작품은 '살아있는' 물성을 얻는다.

경계 위에 서는 것. SAF 2026의 혼합매체·디지털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다. 그 21점은 그래서 전시 전체에서 가장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기조, 〈The Stare〉, 2025, 화판에 목각과 채색
기조, 〈The Stare〉, 2025, 화판에 목각과 채색

함께 읽기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함께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씨앗페

발행 2026-04-09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