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 위에 칼을 대는 순간, 수백 년 전 진경산수화의 정신이 현재로 이어진다. 김준권은 40여 년간 한국의 산하를 발로 걷고 손으로 새기며, 수성 다색목판화로 현대 한국 산수화의 새 지평을 열어온 작가다.

2018년 4월, 그 그림이 배경이 되던 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명록 앞에 섰다. 그의 뒤편, 회담장 벽을 가득 채운 대형 작품 — 백두대간의 장대한 능선이 먹의 농담으로 흘러가는 목판화. 카메라가 그 장면을 포착했고, 다음 날 전 세계 신문에 실렸다.
그 그림이 김준권의 〈산운(山韻)〉이었다.
목판화가가 수십 년간 칼로 새겨온 산이, 한반도 역사의 한 장면을 담은 배경이 되었다. 칼자국이 쌓이면 이런 일도 생긴다.
교사에서 판화가로 — 압수와 해직의 전환점
김준권은 1955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서양화)를 졸업하고 1984년 교사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5년, 전시회 하나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가 압수를 당한 것이다. 예술과 현실이 충돌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했다가 해직됐다.
학교를 떠난 뒤 그는 더 깊이 판화로 들어갔다.
1993년, 충청북도 진천에 정착했다. 이듬해 중국으로 건너가 루쉰(魯迅)미술대학에서 목판화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4년간의 연구가 그의 기법을 근본부터 바꿨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전통 목판화를 연구하며 세 나라의 방식을 종합한 자신만의 수묵·채묵 목판화를 창안해냈다.
1996년, 루쉰미대는 그를 명예 부교수로 임명했다. 귀국 후에는 한국목판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목판화의 연구와 보급에 헌신해왔다.
이 땅의 산을 새기다

김준권의 수성 다색목판화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정신을 현대로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이 땅의 실경을 발로 걸으며 담아냈듯, 그도 직접 산을 오르고 계곡을 걸으며 스케치한다. 백두대간, 그것이 그의 오랜 주제다.
작품 하나에 대여섯 판 이상을 파고 겹쳐 찍는다. 색을 올리고, 먹을 얹고, 다시 판을 덮는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기술적 숙련과 충북 진천의 땅에서 얻는 에너지가 그 바탕이다.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40여 회의 판화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부산, 대구, 청주부터 중국 심양, 일본 도쿄, 미국 LA까지. 2022년 예술의전당에서 연 개인전 '산의 노래'에서는 백두대간을 답사하며 완성한 목판화 100여 점을 한꺼번에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청주시립미술관, 대한민국 국회 — 주요 기관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노무현이 사랑한 판화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특별했다. 두 사람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처음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전시가 열릴 때마다 작품을 구매했고, 재임 기간에는 청와대 로비에 그의 작품을 걸었다. 서거 소식을 들은 김준권은 그날, 장례를 치른 날, 49제 — 세 번의 날을 기리며 세 점의 작품을 헌정했다.
산을 새기는 것이 때로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칼자국이 말하는 것
씨앗페 2026에 출품된 〈산처럼〉(채묵목판, 50×45cm, 2021), 〈푸른 소나무〉(유성목판, 45×80cm, 2023), 그리고 밤의 산경을 서정적으로 담은 〈Blue Moon-3〉(유성목판, 2025)와 〈Blue night-4〉(유성목판, 18×22cm, 2023). 네 점 모두 나무에 칼을 댄 흔적이다.
판화는 복수(複數)의 예술이다. 하나의 판에서 여럿을 찍어낼 수 있다. 40년 넘게 이 복수성을 믿어온 작가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위한 상호부조 기금에 작품을 내놓았다. 더 많은 이들이 예술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 그것이 씨앗페가 가진 정신이기도 하다.
2018년, 역사적인 회담장 벽에 걸린 산이 있었다. 그 산은 한 사람이 수십 년간 칼로 새겨온 것이었다. 칼자국이 쌓이면 이런 일도 생긴다.
김준권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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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