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청년이 있었다. 단 한 학기 만에 학교를 떠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등록금으로 재료를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의 이름이 주재환이다.
등록금이냐 물감이냐
1960년. 스물 살의 주재환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한 학기가 지났다.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이유를 들으면 웃음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뭔가 꽉 막힌 것이 뚫리는 느낌이 든다. 등록금으로 재료를 더 사겠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사서 쓰는 재료가 자신에게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이것이 타협을 모르는 예술가의 첫 선언이었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확신이었다. 어디서 배우느냐보다 무엇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는.
20년간의 방랑, 아니 탐험
학교를 나온 뒤 주재환은 한동안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했다.
20대엔 피아노 외판원이 됐다. 창경궁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파출소에서 방범대원으로 일했다. 이 목록을 읽으면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 꽤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30대에 들어서면서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민속학자 심우성을 도우며 잡지사와 출판사 일을 시작했다. 독서생활, 삼성출판사, 미술과 생활, 미진사를 거쳤다. 책과 글과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몸으로 익혔다.
대학로 학림다방, 명동 은성, 송석. 그가 어울렸던 공간들이다. 미술평론가 이일, 시인 김수영과도 자리를 함께했다.
20년의 방랑처럼 보이는 시간이 실은 가장 넓은 학교였다. 그는 교실 밖에서 시대를 읽었다.
1979년, 미술계에 첫발
주재환이 미술계라 불리는 곳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979년이다. '현실과 발언' 동인 결성 과정에 참여하면서였다.
'현실과 발언'은 당시 제도권 미술에 반기를 든 그룹이었다. 순수 미술의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에 맞서, 역사와 정치와 일상의 언어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선언이었다.
1980년 창립전에 출품한 〈몬드리안 호텔〉과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는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된다. 몬드리안의 격자를 호텔이라는 자본주의의 공간으로 비틀고, 시적인 제목 아래 정치적 메시지를 숨긴 작업들이다. 재기 넘치고 유머러스하면서 날카로운, 주재환 특유의 문법이 여기서 완성됐다.
역사와 함께 달린 작가
198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작업은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주제와 깊이 연결됐다. 1986년 장준하 선생 새긴돌 건립, 1990년 4·19혁명 30주기 기념행사 준비. 그는 재야의 공공적 일들에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제가 바뀌었다. 이번엔 자본 구조에 대한 비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새로운 시대를. 〈미제점 송가〉 〈짜장면 배달〉 〈쇼핑맨〉. 80년대와 다른 눈으로 포착한 90년대의 현실이었다.
베니스에서 유네스코까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재환의 작업은 국제 무대로 나갔다.
2001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 〈이 유쾌한 씨를 보라〉. 제목부터 유쾌하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 출품. 같은 해 유네스코 프라이즈 특별상. 2003년 제50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 참가. 아르세날레의 'Zone of Urgency' 섹션이었다.
2001년엔 제10회 민족예술인상도 받았다.
홍익대를 한 학기 만에 나온 청년이, 피아노를 팔고 아이스크림을 팔다가, 결국 베니스에 갔다.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귀찮아... 라는 제목의 작품
씨앗페 2026에 출품된 주재환의 작품은 한 점이다. 〈귀찮아...〉(2021). 종이에 혼합재료. 230만 원.
제목이 전부다. 귀찮아... 세 글자와 마침표 세 개.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제목이 사실은 꽤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다. 기금 신청서를 써야 하는데 귀찮다. 대출 심사에서 거절당하는 것도 귀찮다. 그 귀찮음을 제목으로 삼은 작가가 지금 씨앗페 연대의 자리에 서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예술인의 역사다
주재환의 이력서를 다시 읽어보자. 피아노 외판원, 아이스크림 장수, 방범대원. 잡지사, 출판사, 다방. 20년간 미술계 밖을 맴돌았던 이유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강제한 구조가 있었다.
1940년에 태어난 그가 작가로 설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은 매우 좁았다. 대출은 없었고 지원금도 드물었다. 예술로 먹고산다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시대였다.
지금은 다른가. 한국 예술인의 84.9%가 주류 금융에서 배제된다는 통계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48.6%가 고금리를 감수한다. 이것은 주재환이 살던 시대의 연장선에 있다.
씨앗페는 그 연장선을 끊으려는 시도다. 작품 판매 수익이 상호부조 기금이 되고, 기금이 연 5% 저금리 대출로 바뀌고, 그 대출이 지금의 누군가에게 닿는다. 2022년 이후 354건. 약 7억 원. 상환율 95%.
주재환이 홍익대 등록금으로 물감을 산 1960년과, 씨앗페가 작품 판매 수익으로 기금을 쌓는 2026년 사이에, 하나의 선이 이어진다.
유쾌한 씨가 남긴 것
2001년 아트선재센터 전시 제목이 〈이 유쾌한 씨를 보라〉였다. 주재환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방식과 닮았다.
그는 어렵지 않다. 무겁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업은 가볍지 않다. 역설이 그의 문법이다. 귀찮은 척하면서 가장 부지런히 살았고, 시장 밖에서 20년을 보내다 결국 베니스까지 갔다.
〈귀찮아...〉라는 한 점이 씨앗페 기금에 보태진다. 그 귀찮음이 누군가의 새 출발을 만든다. 주재환이 1960년에 선택한 것처럼, 지금의 예술인들도 자신의 방식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주재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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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6-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