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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에서 선으로: 이철수 작가의 판화 세계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04-07 · 씨앗페

1954년 서울 태생의 독학 판화가 이철수는 민중미술의 선봉에서 선(禪)의 영성 세계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농사를 짓고 판화를 새기는 지금의 삶 속에서, 그의 나무 칼끝은 여전히 시대의 질문을 파고든다. SAF 2026에 출품한 10점의 작품들은 그 긴 여정의 단면들이다.

저항에서 선으로 — 이철수 작가의 판화 세계

나무를 깎는 일은 뺄셈이다. 있는 것을 없애야 형태가 드러난다. 이철수의 판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개 그 단순함에 먼저 당혹해하고, 그 다음 그 안에 담긴 무게에 압도된다. 선 하나, 여백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독학으로 쌓아 올린 세계

이철수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독서에 빠진 문학 소년이었다.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군 제대 뒤였다. 미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스스로 그림을 공부했다. 독학이라는 말이 흔히 낭만적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실상은 혼자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정표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

1981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해 출판한 산문집 《응달에 피는 꽃》이 보여주듯, 그는 처음부터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을 쓰고, 생각을 나무에 새겼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개인전을 이어갔고, 1989년에는 독일과 스위스의 주요 도시에서 전시를 열었다. 유럽의 미술관 관객들이 한국의 목판 앞에 멈춰 선 것이다. 이후 미국 시애틀까지 발을 넓혔다.

민중의 언어로 새긴 시절

1980년대, 이철수의 판화는 저항의 언어였다. 민중판화라는 이름 아래, 당대의 억눌린 목소리들이 그의 나무판에서 형태를 얻었다. 단순하고 날카로운 선들, 직접적인 메시지. 그 시절 그의 판화는 벽에 붙고, 거리에서 돌았다. 예술이 선동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사람들의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이철수는 민중판화가라는 딱지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가 그에게 건넨 언어였지, 그가 도달하려는 세계가 아니었다.

이철수, 〈독도-마음바다〉, 2013, 목판·한지, 76×47cm
이철수, 〈독도-마음바다〉, 2013, 목판·한지, 76×47cm

선(禪)으로 향하는 칼끝

어느 순간부터 그의 판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노 대신 고요함이 깔렸다. 구호 대신 질문이 새겨졌다. "에고, ego", "에고, 이 얼굴이 네 얼굴이냐?" 같은 작품들은 제목부터가 선문답이다. 누군가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칼날이다.

이 전환을 두고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철수 본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이동이었을 것이다. 저항이란 결국 '있어선 안 될 것'을 향한 분노다. 선이란 '있는 것 그대로'를 바라보는 힘이다. 나무를 깎는 방식은 같아도,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당대의 화두를 손에서 놓지 않는 그는, 평화와 환경 의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농사와 판화 작업을 하고 지낸다."

이철수, 〈에고, ego〉, 2021, 목판·한지, 50×42cm
이철수, 〈에고, ego〉, 2021, 목판·한지, 50×42cm

20여 권의 목소리

이철수는 판화가이면서 동시에 산문 작가다. 20권이 넘는 저서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학고재에서 낸 《마른 풀의 노래》, 문학동네의 《배꽃 하얗게 피던 밤에》, 삼인 출판사의 '나뭇잎 편지' 시리즈까지. 그의 글은 판화만큼이나 짧고 단호하다. 불필요한 말을 깎아내는 방식이 목판을 다루는 방식과 닮았다.

2011년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나무에 새긴 마음》을 출판했다. 30년의 작업을 한 권에 담는 일.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증언이다.

SAF 2026에 내놓은 10점

SAF 2026에 이철수는 1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중 가장 주목할 작품은 단연 《무문관 50장(연작판화)》이다. 가격 5,000만 원. 이번 전시 최고가 작품 중 하나다. 무문관(無門關)은 중국 선승 무문 혜개가 엮은 48개의 선문답 모음집이다. 문이 없는 관문. 답이 없는 질문들. 이철수는 그것을 50장의 판화로 새겼다.

나머지 작품들도 그의 세계를 고루 보여준다.

이철수, 〈신령스러운〉, 2019, 목판, 한지, 96x64cm
이철수, 〈신령스러운〉, 2019, 목판, 한지, 96x64cm
이철수, 〈용비어천가〉, 2024, 목판, 한지, 130x60cm
이철수, 〈용비어천가〉, 2024, 목판, 한지, 130x60cm
이철수, 〈물흐르고 흘러 바다〉, 2016, 목판, 한지, 98x42cm
이철수, 〈물흐르고 흘러 바다〉, 2016, 목판, 한지, 98x42cm
이철수, 〈호박옹〉, 2019, 목판, 한지, 60x50cm
이철수, 〈호박옹〉, 2019, 목판, 한지, 60x50cm

목판에 한지. 재료는 일관되다. 가장 한국적인 재료로, 가장 깊은 질문을 새긴다.

이철수, 〈입춘〉, 2018, 목판·한지, 50×42cm
이철수, 〈입춘〉, 2018, 목판·한지, 50×42cm

농사와 판화 사이

지금 이철수는 농사를 짓는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과 나무를 깎고 먹을 바르고 한지를 찍어내는 일. 두 가지 노동이 그의 하루를 채운다.

평화와 환경 문제는 그에게 구호가 아니다. 농부로서의 일상이 곧 그 문제를 살아내는 방식이다. 땅을 돌보는 사람이 환경을 이야기할 때, 말에 무게가 실린다.

이철수가 SAF 2026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동료 예술인들의 현실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다. 창작자가 창작만으로 살 수 없는 구조. 그것이 한국 예술계의 오래된 문제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40년이 넘는 작업 이력이 증인이다.

나무를 깎는 일은 뺄셈이다. 하지만 이철수의 판화는 그렇게 덜어낸 자리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 고요함, 질문, 그리고 오래된 연대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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