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를 공부하고 20년간 그림을 포기했던 작가가 사진으로 돌아왔다. 손은영의 카메라는 집을 찍고, 이제는 집 앞의 정원을 찍는다.

손은영은 회화를 전공하고, 20년간 그림을 포기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결혼 후 아이들 곁에 있기 위해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남기려고 카메라를 샀다. 그 카메라가 그녀를 사진가의 길로 데려다 놓았다.
아이들이 카메라를 피하면서
처음에는 아이들을 찍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카메라를 피하기 시작했다. 렌즈가 향한 곳에서 아이들이 사라지자, 작가는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집'이었다.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하며 손은영은 서양화의 색감과 구성 감각을 사진에 심기 시작했다. 두 매체 사이의 경계가 그녀의 작업이 되었다.
2018년, 서울시청 하늘광장 갤러리 작가 공모에 당선돼 첫 개인전 《The Underground》를 열었다. 이듬해 갤러리 브레송에서 《검은 집》(2019). 강원도 고성 산불로 소실된 집들을 촬영하기 위해 1년간 2주에 한 번씩 현장을 찾았다. 사진의 사실성에서 회화적 변형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이었다.
밤의 집

2020년부터 본격화된 《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 시리즈는 2021년 제2회 FNK Photography Award 수상으로 이어졌다.
사진을 찍는 데 걸린 시간보다, 찍은 뒤 포토샵으로 한 달에서 한 달 반 동안 보정하는 시간이 더 길다. 중형 디지털 카메라와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레이어 작업으로 조정한다. 나무의 결, 시멘트 벽의 질감은 대비를 높여 강조하고, 지붕이나 담벼락 같은 단순한 면은 일부러 평면화한다. 사진을 사진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회화로 건너가게 하는 공정이다.
《기억의 집》(2023) 완성에 2년, 《밤의 집》 완성에 3년. 초기에는 한 장을 완성하는 데만 석 달을 매달렸다. 작품은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에 소장됐다.
집에서 정원으로
약 10년을 '집'에 천착해온 작가가 2024년 6월 갤러리 브레송에서 《모네의 정원》을 열었다.
"어릴 때 살던 집 앞에 연못이 있었어요. 장미도 피고, 엄마가 물을 뿌리던 그 정원이 참 좋았죠."
정원은 집의 일부이면서 집이 아니다. 집 안도 아니고 길도 아닌 중간의 자리. 손은영에게 정원은 '기억의 문턱'이다. 어두운 밤길 끝에 보이던 창문의 불빛. 비 오는 날 연못에 동그랗게 번지던 물결. 엄마가 정원에 물을 뿌리던 소리.
철학자 최진석은 "욕구는 텃밭에 있고 욕망은 정원에 있다"고 썼다. 먹을 것을 심는 텃밭과 달리, 정원은 못 먹는 것들로 채워진다. 꽃, 향기, 빛, 무늬, 그리고 예술. 손은영의 최근 작업은 그 욕망의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사진가 김영호는 이 전환을 두고 "기존에 '집'이라는 곳에 천착해온 작가가 이번에 집을 벗어나 '정원'이라는 공간에 눈을 돌림으로써 자기 집에 대한 감각을 확장시켰다"고 평했다.
2026년, 작가는 뉴욕 GALA ART CENTER에서 《Houses where the time lives》를 연다.
마치 도색하듯이, 고치듯이
"서울과 지방을 오고 가며 다양한 형태의 집들을 찍고, 마치 도색하듯이 색을 입히고, 낡거나 헌 물건을 고치듯이 새롭게 만든다."
이것은 손은영의 작업 프로세스이자 동시에 철학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손을 거쳐 '기억'에 가깝게 복원하는 일. 사진이 기록의 매체가 아니라 창작의 매체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을 내놓는 방식
손은영은 씨앗페에 〈The Houses at Night, 2021, #81〉과 〈언덕위의 집〉 두 점을 내놓았다.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이 만드는 상호부조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20년을 엄마로 보내고 다시 창작으로 돌아온 작가가, 이제는 집을 다른 집에 보낸다. 누군가의 벽에 걸리는 손은영의 집은 다시 한 번 '사라지지 않는 최후의 가치'를 건넨다.
불빛이 비추는 자리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집 창밖으로 비추는 불빛을 본 적 있다면, 그 집은 더 이상 건축물이 아니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자리다.
손은영의 사진이 전하는 것도 결국 그런 불빛이다. 낡아도 사라지지 않고, 변형해도 훼손되지 않는 기억의 자리.
손은영의 작품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함께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 첫 작품을 산 사람들 — 네 명의 컬렉터에게 듣다 — 첫 작품을 들이는 순간은 모두 다릅니다. 취업 첫 월급, 엄마의 생일, 이혼 후 새 집 — 씨앗페에서 첫 작품을 산 네 사람의 이야기.
- 이윤엽 — '파견미술가'의 다색 목판, 노동의 결을 새기다 — 한국 다색 목판화 거장 이윤엽. '파견미술가' 액티비스트, 공장 고무판 매체, 농부·노동자 모티브,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5점 큐레이션.
- 이철수 — 민중판화에서 선(禪)의 판화로, 한국 목판화의 한 결 — 1954년생 한국 목판화의 거장 이철수. 1980년대 민중판화 → 선(禪)·영성·평화의 판화로 30년 작업 변화. 충북 제천 농사+판화. 5점 큐레이션.
관련 매거진
같은 길을 걷는 작가들
- 안소현 — 배우의 눈으로 도시를 찍다: 안소현의 Authentic City
- 최재란 — 쿼크와 카이로스 사이: 최재란의 수원, 시간의 사진
- 정금희 — 꽃이 떨어져 흙이 되다, 일체유심조: 정금희의 花落以土
작품 구매 가이드
씨앗페
발행 2026-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