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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자화상이 될 때: 이현정의 발효하는 시간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04-09 · 씨앗페

얼어붙은 강 위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 이현정의 김치 시리즈는 발효와 숨, 상처와 회복이 하나의 물성 속에 얽혀 있다.

이현정, 〈김치2025-2〉, 2025, Oil on canvas, 72.5x60.6cm
이현정, 〈김치2025-2〉, 2025, Oil on canvas, 72.5x60.6cm

2018년 겨울, 이현정은 얼어붙은 강 위로 걸어갔다.

손에 쥔 것은 고춧가루였다. 차갑게 굳은 흰 표면 위로 붉은 가루가 번졌다. 억눌린 감정의 분출이었고, 동시에 얼어붙은 세계 속에서도 끝내 드러나는 "살아 있음"의 방식이었다. 이것이 이현정 작업의 첫 장면이었다. 이름은 《숨-길》. 그해 평창 동계올림픽 문화올림픽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되어 DMZ에서 선보인 프로젝트였다.

김치가 자화상이 되기까지

그 장면은 2019년부터 이어지는 '김치 시리즈'로 번졌다.

이현정에게 김치는 음식이 아니다. 자화상이다. 절여지고, 버무려지고,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다른 맛과 결로 바뀌는 과정. 그것은 상처와 기억이 삶 속에서 이동하고 변화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발효는 시간이 물질을 바꾸는 일이다. 이현정의 그림은 그 변환을 캔버스 위에 눌러담는다.

한식진흥원 매거진은 "작가에게 김치는 단순한 음식 이상이며, 살아온 시간과 발효의 과정을 담은 자화상"이라고 평했다.

김치2025-2, 이현정
김치2025-2, 이현정
〈김치2025-2〉 — 붉음은 충격이 아니라 살아남은 시간의 온기다

강한 붉음. 생생한 물성. 그 불편함을 단지 충격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현정은 그 안에서 "살아남은 시간"의 온기와 회복의 가능성을 붙든다. 김치처럼 심장이 있고, 심장처럼 김치가 뛴다.

숨과 심장이 만나는 곳

《숨-의미심장》에서 이현정은 숨과 심장을 생리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 물질과 비물질.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닿는 지점. 그 지점을 관객이 공간 속에서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너와 나'의 연결이 발생하는 감각. 그것이 이 작업의 목적이다.

김치2024-3, 이현정
김치2024-3, 이현정
〈김치2024-3〉 — 2024년작. 같은 주제를 반복하되 더 깊어진다

이현정의 작업은 회화에서 출발해 설치와 퍼포먼스로 확장된다. 〈이씨! 표류기〉 연작에서는 가족의 경험을 거즈책, 아카이브, 영상, 설치로 다시 엮었다. 말로 다 옮기기 어려운 시간을 감각의 언어로 전하는 일. 사라진 것들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오는 경로를 만드는 일.

경계를 넘는 발효

개인전 8회. 국내에서는 갤러리호호, CICA미술관, 대안예술공간이포, 정문규미술관에서, 국외에서는 네팔 카트만두(2020), 일본 후쿠오카(2022·2023)에서 전시를 이어왔다.

2023년, 이현정은 독일 포츠담 Kunstraum Potsdam으로 초청받았다. 《UTOPIA?! PEACE》 전시와 퍼포먼스. 붉은 물성과 발효의 시간이 유럽의 공간에서 다시 한번 번졌다. 같은 해 베를린장벽기념관에서도 전시가 이어졌다.

2024년, 제2회 후쿠오카 아트 어워드 우수상. 작품은 후쿠오카시미술관에 소장되었다.

김치2023-2, 이현정
김치2023-2, 이현정
〈김치2023-2〉 — 발효는 시간이 만드는 일이다

수상은 숫자가 아니다. 2018년 얼어붙은 강 위의 고춧가루에서 시작된 탐구가, 시간이 지나며 다른 맛과 결을 얻었다는 증거다. 김치처럼.

2026년 현재, 이현정은 부산문화재단 홍티아트센터 레지던시 장기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부산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발효하는 연대

이현정은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았다.

발효는 기다림을 배우는 과정이다. 지금 당장은 쓰고 불편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것이 된다.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이 숫자도 발효 중이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아 만드는 상호부조 기금.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불편한 현실을 끝까지 붙들며 회복의 가능성을 만드는 일. 이현정이 캔버스에서 해온 일과 다르지 않다.

강은 다시 흐른다

2018년 겨울, 고춧가루가 번진 얼음 위로 봄이 왔을 것이다.

얼음이 녹으면 강은 다시 흐른다. 붉은 흔적도 강 속으로 섞인다. 이현정의 김치가 숙성되듯, 그 붉음도 어딘가로 스며든다. 살아있는 것들은 계속해서 변한다. 그것이 발효이고, 그것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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