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면이 만나는
중간 지대
두텁게 쌓아 올리고, 다시 긁어내며.관계와 갈등, 그리고 더딘 타협의 일.
쌓고, 긁어내고 —
관계의 추상
정재철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화가다. 그의 작업은 추상에 속하지만, 주제를 가진 추상이다 — 관계와 갈등, 그리고 더불어 사는 일이 요구하는 긴 타협의 과정.
그의 대표 연작 〈Middle Ground〉는 그 주제를 묘사가 아니라 과정으로 가시화한다. 그는 화면을 두터운 물감의 겹으로 쌓아 올린 뒤, 그 안을 다시 긁어낸다 — 더해진 것과 덜어낸 것이 같은 평면 위에 나란히 읽히도록. 그림은 관계의 그림이 아니다. 관계가 남긴 자국이다.
그의 방법론의 핵심에 놓인 두 물리적 행위 — 쌓음과 긁어냄 — 은 작업의 의미를 곧장 실어 나른다. 질감을 쌓는 일은 주장하는 일이고, 그것을 긁어내는 일은 양보하는 일이다. 어느 쪽도 완전히 이기지 않는 둘 사이에서 제3의 음역이 떠오른다 — 닳고 협상된, 중간 지대 그 자체의 표면.
그의 작업에서 물감의 물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임파스토의 융기와 긁어낸 자리에 남은 고랑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손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기록된, 마찰과 화해라는 과정의 흔적이다. 보는 이는 갈등과 타협을 이야기가 아니라 질감으로 읽는다 — 이해되기 전에 표면을 가로질러 먼저 느껴지는 무엇으로.
그러니 정재철의 추상에서 그리는 행위와 그 주제는 하나다.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번갈아 더하고 포기하는 일이며, 그 결과로 남는 표면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 중간 지대란 그 울퉁불퉁함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다.
주요 테마
- 1
〈Middle Ground〉 — 중간 지대
대표 추상 연작. 어느 한쪽도 이기지 않은 채 두 면이 만나는 자리에 떠오르는, 닳고 협상된 평면.
- 2
쌓음과 긁어냄
두터운 임파스토를 쌓고 다시 긁어낸다. 쌓음과 덜어냄을 함께 붙드는, 작업의 물리적 문법.
- 3
갈등과 타협
질감으로 옮겨진 관계. 더불어 사는 일의 마찰과 화해를, 이해되기 전에 표면에서 먼저 읽는다.
매체와 방법
- 추상 회화 — 관계와 타협을 주제로 삼는 비구상 작업.
- 두터운 질감(임파스토): 무겁고 융기한 겹으로 쌓아 올린 물감.
- 긁어내기(스그라피토): 쌓인 표면을 다시 깎아, 더함과 덜어냄이 함께 보이게 한다.
- 주제: 관계와 갈등, 그리고 타협의 과정.
학력
-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세 편의 에세이 —
질감과 행위, 그리고 중간에 관하여
1쌓음과 긁어냄 — 두 행위, 하나의 표면
정재철 작업의 중심에 놓인 방법은 짐짓 단순하다. 그는 표면을 쌓아 올리고, 그러고 나서 덜어낸다. 두터운 물감이 무거운 겹으로 내려앉고, 그 겹 안으로 그는 긁어 들어가 아래에 놓인 것을 다시 드러낸다. 두 행위는 정반대이며, 그는 둘을 같은 평면 위에 함께 보이게 둔다.
작업 특유의 밀도가 여기서 온다. 매끄러운 추상은 제 만듦새를 감추지만, 정재철의 표면은 그것을 고집한다. 임파스토 붓질의 융기와 긁어낸 고랑은, 더하려는 충동과 덜어내려는 충동이라는 두 상반된 힘의 증거로 나란히 앉는다 — 결코 완전히 상쇄되지 않는 채로. 각각은 상대를 조금씩 지우고, 나머지를 세워 둔다.
아무것도 평평하게 갈아내지 않기에, 그림은 제 논쟁의 시간을 간직한다. 질감 안에서 손이 어디서 밀고 나갔고 어디서 물러섰는지 읽을 수 있다. 표면은 결론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낸 밀고 당김의 기록이다 — 이미지가 아니라 질감이 의미를 실어 나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Middle Ground〉 — 어느 쪽도 이기지 않는 자리
그의 대표 연작 제목은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위치를 가리킨다. 중간 지대란 대립하는 두 편이 완전한 승리에 못 미친 채 멈췄을 때 남는 것이다 — 결국 함께 나누게 되는, 닳은 공유지. 그것은 말끔히 도달한 타협이 아니라 갈려 나가며 생겨난 타협이다.
정재철의 그림은 그 발상을 보기 드문 직접성으로 물감에 옮긴다. 쌓인 겹은 주장을, 긁어낸 자리는 양보를 대신하고, 둘 다를 견디고 살아남은 표면이 곧 중간 지대다 — 더해진 모든 것과 포기된 모든 것의 자국을 짊어진 채로. 그 평면은 공유된 영역이며, 모든 공유지가 그렇듯 울퉁불퉁하다.
이 연작이 한낱 발상의 삽화에 머물지 않는 까닭은, 의미가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되기 때문이다. 갈등과 타협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겹 한 겹, 한 번 또 한 번 긁으며 행해진다. 캔버스 자체가, 두 면이 협상하여 만들어 낸 중간 지대가 될 때까지.
3추상이라는 정직함 — 관계가 된 질감
관계를 하나의 장면으로 그리는 일은 쉬울 것이다 — 두 인물, 한 방, 하나의 몸짓. 정재철은 그 쉬움을 사양한다. 추상에 머묾으로써, 그는 의미를 그려진 하나의 이야기로 정착시키기를 거부하고, 대신 그것을 질감이라는 열린 음역에 남겨 둔다. 보는 이마다 이름 붙이기 전에 마찰을 먼저 느끼는 자리에.
이것은 일종의 정직함이다. 관계란 사실 매끄러운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쌓임과 긁힘이고, 전진과 양보이며, 그 결과로 남는 표면은 좀처럼 고르지 않다. 쌓고 긁어낸 물감으로 이루어진 추상은, 단정한 구상 장면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울퉁불퉁함에 충실하다.
그리하여 〈Middle Ground〉 연작에서 그림과 그 주제는 같은 것이 된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번갈아 더하고 포기하는 일이고, 그것을 본다는 것은 손으로 쌓은 표면의 결에서 그 과정을 느끼는 일이다. 캔버스에 남는 것은 타협의 묘사가 아니라, 타협의 실제이자 질감을 입은 잔여다.
처음 쌓아 올린 한 겹에서 마지막 긁어냄까지, 정재철의 추상은 하나의 물음을 추구해 왔다 — 표면은 어떻게 더불어 사는 일의 마찰과 화해를 간직하는가. 임파스토와 스그라피토로 〈Middle Ground〉 연작을 가로질러 이뤄 낸 대답이, 갈등과 타협이 묘사되지 않고 기록되는 질감이다. 씨앗페에는 이 캠페인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 예술인과의 연대자로 함께한다 — 작품 판매 수익이 오늘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주요 작품
총 1점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정재철 작가는 동료 예술인을 위한 연대의 뜻으로 씨앗페에 함께했습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대출 기금으로 이어집니다. 작품 한 점의 구매가, 오늘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 한 사람의 다음 한 달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