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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수 · 회화

빛이
지나간 자리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시각을.그림자와 이면을 통해 떠오르는 존재.

사물을 보는 시각 —
사물이 아니라 시선을 그리다

정연수는 일상의 사물에 깃든 시간과 시선을 회화로 옮겨 온 작가다. 그의 관심은 묘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 위에 내려앉는 봄(視) 그 자체에 있다 — 그가 이름 붙인 ‘사물을 보는 시각’. 컵 하나, 의자 하나, 탁자 위의 작은 도구 하나는 그의 작업에서 재현해야 할 소재가 아니라, 하나의 시선이 눈에 보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의도가 그의 중심 연작에 제목을 부여한다. 〈reflection(빛이 지나간 자리)〉 시리즈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시각을 그리고자 하며, 그림자와 이면으로 — 대개 지나쳐 버리는 사물의 부분으로 — 돌아선다. 그곳을 존재가 가장 온전히 드러나는 자리로 삼는다. 사물의 앞면이 감추는 것을, 그 그림자가 되돌려 준다.

밝은 앞면이 아니라 이면과 그림자를 그린다는 것은, 존재가 어떻게 알려지는가에 관한 조용한 주장이다. 사물은 눈과 마주치는 표면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드리우는 흔적이고, 밀어낸 어둠이며, 이미 그 위를 지나가 버린 빛이다. 이면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의 회화는 회화 자체 안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 존재는 빛으로 밝혀지기보다, 빛이 지나가며 남긴 자국으로 드러난다는 가능성을.

그의 작업은 현재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한다. 디지털화되고 탈사물화된 시대에, 우리 곁의 일상 사물은 점점 얇아진다 — 화면으로 대체되고, 데이터로 풀어지고, 잊혀 간다. 그 잊힘에 맞서 정연수는 하나의 믿음을 지킨다. 작고 일상적인 사물 하나하나가 고유한 시간과 역사를 품고 있다는 믿음. 그런 사물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사물이 아니라 들여다봄 자체를 그린다는 것은, 지나쳐지는 것이 그래서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의 화면은 줄곧 이 좁은 이음매에 머문다 — 사물과 시선 사이, 밝은 앞면과 그것이 남긴 그림자 사이의 틈. 그의 그림 앞에 서는 일은,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들에게로, 그리고 그 사물들이 조용히 간직해 온 시간에게로 가만히 되돌려지는 일이다.

주요 테마

  • 1

    사물을 보는 시각

    사물을 대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내려앉는 봄 자체를 그린다. 표면이 아니라 시선을 눈에 보이게 한다.

  • 2

    그림자와 이면

    〈reflection(빛이 지나간 자리)〉 시리즈에서 존재는 지나쳐지는 사물의 이면을 통해 드러난다. 앞면이 감추는 것을 그림자가 되돌려 준다.

  • 3

    일상 사물의 시간

    디지털화·탈사물화된 시대에, 잊혀가는 일상의 사물 하나하나가 고유한 시간과 역사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작업의 전제

  • 매체: 회화. 주제는 사물이 아니라 그것과 마주하는 시선이다.
  • 중심 연작: 〈reflection(빛이 지나간 자리)〉 시리즈.
  • 드러냄의 방식: 밝은 앞면이 아니라 그림자와 이면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 출발점: 탈사물화된 시대에도 일상의 사물이 저마다 고유한 시간과 역사를 품는다는 믿음.

세 편의 에세이 —
시선과 그림자, 그리고 사물에 관하여

1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시각을

대부분의 정물은 닮음의 물음에서 시작한다 — 탁자 위의 사물을 얼마나 충실히 화면으로 되돌릴 수 있는가. 정연수의 작업은 그보다 한 걸음 앞에서 시작한다 — 닮음에 앞서는 봄에서. 그가 밝힌 목표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시각을 그리는 것이다. 사물은 계기이고, 시선이 주제다.

이것은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시선에는 그 자신의 표면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간접적으로만 보일 수 있다 — 보는 이가 무엇을 알아차리도록 이끌리는지, 주의가 어디에 머물게 되는지, 그림이 사물의 어느 부분에 무게를 두기로 하는지를 통해서. 바라본 사물이 아니라 바라봄을 중심으로 화면을 조직함으로써, 그는 보는 이가 자신의 봄을 자각하게 한다 — 컵만이 아니라, 컵을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도록.

그런 의미에서 그의 회화는 조용히 반사적이다. 눈을 그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일상의 사물은 하나의 시각이 붙들려 머무는 거울이다 — 그렇기에 그의 손에서는 가장 평범한 사물조차 그림의 긴 응시를 받을 만한 것이 된다.

2〈reflection〉 — 빛이 지나간 자리

〈reflection(빛이 지나간 자리)〉 시리즈는 그 제목 자체에 작가의 사유를 담는다. reflection은 광학적인 것이면서 — 비친 상, 반짝임, 그림자 — 동시에 안으로 헤아리는 사색의 행위다. 한국어 부제 빛이 지나간 자리는 근원이 아니라 자리를 이름 짓는다. 등불이 아니라, 그것이 옮겨 간 뒤에 남긴 흔적을.

그래서 작업은 그림자와 이면으로 돌아선다. 밝은 앞면은 스스로를 선언한다 — 눈에게 손쉬운 답을 준다. 사물의 뒷면, 그것이 드리운 어둠은 더 천천히 읽히기를 청한다. 지나쳐지는 쪽을 택함으로써, 정연수는 존재가 간접의 음역에서 드러나게 한다 — 그 위에 내린 빛이 아니라, 빛이 지나가며 남긴 자국으로 알려지는 사물.

여기에는 다정함이 있다. 빛이 지나간 자리를 그린다는 것은, 존재만큼이나 부재에 정성껏 귀 기울이는 일이고, 대개 밝혀진 것에만 허락되는 진지함을 그림자에게도 나누어 주는 일이다. 그의 화면에서 사물과 그림자는 주체와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드러남의 두 절반이다 — 앞면이 보여 주고, 이면이 들려준다.

3탈사물화 시대의 사물 — 간직된 시간

정연수가 일상의 사물에 기울이는 주의는 그 자체를 위한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에 대한 응답이다. 디지털화되고 탈사물화된 시대에, 우리 곁의 물리적 사물들은 조용히 무게를 비워 간다 — 기능은 화면으로 옮겨 가고, 소유는 계좌와 데이터로 풀어지며, 한때 삶의 질감을 담았던 작은 도구들은 얇아지고 잊히기 쉬운 것이 된다.

그 얇아짐에 맞서 그의 작업은 하나의 믿음을 지킨다. 그런 사물 하나하나가 고유한 시간과 역사를 품는다는 믿음. 의자는 몸을 받아 왔고, 컵은 입술과 만났으며, 닳은 손잡이는 한 손을 기억한다. 이 역사들은 스스로를 알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찾아져야 한다 — 그리고 그것을 찾는 일이 바로 그의 회화가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의 두 절반이 여기에서 만난다. 사물을 보는 시각을 그리는 일과 빛이 지나간 자리를 그리는 일은, 끝내 사물이 간직한 시간을 간직하는 일이다 — 회화라는 느린 수단으로, 시대가 손쉽게 만드는 잊힘을 거절하는 일. 그의 화면은 지나쳐지는 사물이 무게 없는 것이 아니며, 응시가 그 자체로 간직의 한 형식이라는 조용한 주장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시각을 그리는 일에서, 그리고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를 찾아 그림자와 이면으로 돌아서는 일에서, 정연수는 하나의 차분한 물음을 추구한다 — 사물은 어떻게 자신의 시간을 알리는가. 씨앗페에는 이 캠페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과의 연대자로 함께한다 — 작품 판매 수익이 오늘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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