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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의 세계: 원본이 여러 장이라고?

미술 산책 · 발행 2026-04-07 · 씨앗페

"판화는 여러 장 찍으니까 복제 아닌가요?"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목판화부터 석판화, 실크스크린까지 — 판화의 4대 기법을 풀어보고, 에디션 번호가 왜 작품의 가치를 보증하는지, 오윤의 사후판화가 왜 40년이 지난 지금도 원본인지를 설명한다.

판화의 세계 — 원본이 여러 장이라고?

갤러리에서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판화는 여러 장 찍잖아요. 그럼 복제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오해가 하나 깔려 있다. 복제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똑같이 만드는 행위다. 판화는 다르다. 작가가 판을 직접 손으로 깎고, 잉크를 올리고, 종이에 찍는 — 그 물리적 행위 자체가 예술이다. 찍힌 모든 장이 그 행위의 결과물이고, 그래서 모두 원본이다.

판화를 만드는 네 가지 방식

판화는 판에 어떻게 이미지를 만드느냐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볼록판화 — 튀어나온 부분이 찍힌다

목판화(woodblock print)가 대표적이다. 나무판에 칼로 이미지를 새긴다. 새기지 않은 부분, 즉 튀어나온 면에 잉크를 올리면 거기에만 색이 묻는다. 도장 찍는 원리와 같다. 이철수의 마음항아리, 용비어천가, 입춘이 모두 목판, 한지 재료로 이 방식을 쓴다. 나무결과 칼자국이 그대로 화면에 남아서 손맛이 직접 전달된다.

이철수, 〈독도-마음바다〉, 2013, 목판·한지, 76×47cm
이철수, 〈독도-마음바다〉, 2013, 목판·한지, 76×47cm

오목판화 — 새겨진 홈이 찍힌다

에칭(etching)이나 드라이포인트(drypoint)가 여기에 속한다. 금속판에 바늘이나 산으로 홈을 판다. 잉크를 판 전체에 바른 뒤 표면을 닦아내면 홈에만 잉크가 남는다. 거기에 종이를 대고 강한 압력으로 찍으면 가늘고 정밀한 선이 나온다. 동판화의 섬세한 질감이 이 방식에서 나온다.

평판화 — 평평한 면에서 기름과 물이 반발한다

석판화(lithography)가 대표적이다. 돌판이나 금속판에 유성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 뒤, 판에 물을 바르면 기름이 닿은 곳에만 물이 안 묻는다. 거기에 유성 잉크를 올리면 기름이 닿았던 그림 부분에만 잉크가 붙는다. 박영선의 무제 2점이 석판화, 종이 재료로 제작됐다.

공판화 — 잉크가 통과하는 방식

실크스크린(silk screen)이 여기에 속한다. 촘촘한 망사(스크린)에 이미지 모양대로 구멍을 내고, 잉크를 밀어 통과시킨다.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이 즐겨 쓴 방식이기도 하다. SAF에서는 민정기의 추수가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됐다.

기법원리특징
볼록판화 (목판화)돌출면에 잉크나무결·칼자국의 손맛
오목판화 (에칭)홈에 잉크세밀하고 정교한 선
평판화 (석판화)기름·물 반발유연하고 회화적인 표현
공판화 (실크스크린)잉크가 통과선명하고 반복적인 색면

에디션 넘버링 — 1/50이 의미하는 것

판화 작품 라벨에서 1/50, 5/10 같은 숫자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앞 숫자는 이 작품이 몇 번째로 찍힌 것인지, 뒤 숫자는 전체 몇 장을 찍었는지다.

1/50이면 50장 중 첫 번째. 5/10이면 10장 중 다섯 번째.

작가가 직접 서명하고 번호를 적는다. 이 서명과 번호가 작품의 진위와 한정성을 보증한다. 총 발행 수량이 적을수록, 번호가 낮을수록 시장에서 가치를 더 인정받는 경향이 있다.

AP·EA·HC 같은 특수 기호와 에디션 넘버링 전체 해설은 판화와 원화, 에디션 번호 읽는 법을 참고.

SAF 판화 작품 중 강레아의 #01_S1707SP는 에디션 1/9다. 세상에 9점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안소현의 Authentic City는 에디션 2/10으로 10점 한정이다.

이철수, 〈입춘〉, 2018, 목판·한지, 50×42cm
이철수, 〈입춘〉, 2018, 목판·한지, 50×42cm

"판화 한 장 한 장이 원본입니다. 작가의 손과 판이 만든 결과물이니까요." — 판화 작가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

사후판화란 무엇인가

SAF 2026에는 오윤(1945–1986)의 사후판화 18점이 출품됐다. 형님, 춤2, 소리꾼1, 대지, 귀향, 팔엽일화, 춘무인추무의 등이다.

오윤은 한국 민중미술의 핵심 작가다. 1980년대 격동기에 목판화로 민초들의 삶을 기록했고, 1986년 마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목판 원판은 지금도 존재한다.

사후판화는 작가 사후에 유족 또는 공인 기관이 생전에 작가가 제작한 원판으로 한정 수량을 찍어낸 것이다. 판이 작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상, 그 판에서 찍힌 작품도 원본의 연장선에 있다고 판화계는 본다. 위조품이 아닌, 작가 정신의 유산이다.

오윤의 대지(1983)는 36x43.3cm 크기로, 40년 전 그가 칼로 새긴 나무판에서 나온 그 선들이 그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오윤, 〈낮도깨비〉, 1985, 목판(사후판화), 54.5×36cm
오윤, 〈낮도깨비〉, 1985, 목판(사후판화), 54.5×36cm

아트프린트는 판화와 다르다

아트프린트는 전통 판화와 혼동하기 쉽지만 제작 방식이 다르다. 작가가 만든 원본 이미지(그림 또는 디지털 파일)를 고해상도로 스캔하거나 촬영한 뒤, 전문 프린터로 출력한다. 박재동의 할머니 - 아이고 우리손자, 한강변, 촛불 같은 작품들이 'Pigment on watercolor texture' 재료로 여기에 해당한다.

판을 직접 새기는 물리적 행위가 없다는 점에서 전통 판화와 구별된다. 그렇다고 아트프린트가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접근성 높은 가격에 좋은 작가의 이미지를 소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피그먼트 잉크를 쓰면 수십 년 이상 색이 유지된다. 아키벌 피그먼트 프린트의 보존성과 사진 에디션 컬렉팅 방법은 아키벌 피그먼트 프린트란?에서 자세히 다룬다.

판화를 사려는 사람에게

판화를 처음 살 때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

  • 에디션 번호와 총 수량: 낮을수록 희소성이 높다
  • 작가 서명 여부: 친필 서명이 있어야 한다
  • 재료: 목판인지, 석판인지, 동판인지에 따라 질감이 다르다
  • 사후판화 여부: 생전 판화인지, 사후판화인지 구별해서 이해할 것

판화는 그림보다 가격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원본성을 갖춘 장르다.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에디션 종류(유일본·한정판·오픈) 완전 정리도 함께 읽어보자.

류연복, 〈북한산을 거닐다-2〉, 2013, 한지에 목판화, 38×165cm
류연복, 〈북한산을 거닐다-2〉, 2013, 한지에 목판화, 38×165cm

자주 묻는 질문

Q. 판화 뜻이 무엇인가요? A. 판화는 작가가 판(版)에 이미지를 새기거나 부식시킨 뒤, 그 판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반복 찍어낸 작품입니다. 판을 매개로 여러 장의 원본을 만든다는 점이 회화와 다릅니다.

Q. 판화도 원본인가요? A. 네. 작가가 직접 제작한 판에서 작가의 감독 하에 찍어낸 판화는 원본으로 인정됩니다. 각 점에 작가 서명과 에디션 번호가 있어야 원본성이 인정됩니다.

Q. 목판화·동판화·석판화·실크스크린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A. 목판화는 나무에 이미지를 새겨 볼록하게 남은 면에 잉크를 묻혀 찍고, 동판화는 금속에 파인 선 속에 잉크를 채워 찍습니다. 석판화는 지방 성분 차이로 이미지를 만들어 찍고, 실크스크린(세리그래피)은 천 위로 잉크를 밀어 통과시키는 방식입니다.

Q. 사후판화는 원본인가요? A. 사후판화(작가 사후 제작본)는 원본 에디션과 별도로 관리됩니다. 소장 가치는 있지만 작가 생전에 감독한 작품과는 다르게 평가됩니다. 구매 전 생전 판화인지 사후판화인지 반드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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