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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을 그리는 화가: 심모비의 메가바이트 침식 윤회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04-20 · 씨앗페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의 자리, 연옥. 심모비는 디지털과 물리를 오가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캔버스 위에 윤회시킨다.

심모비, 〈9408 SIM_Visibility〉,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45.5x53cm
심모비, 〈9408 SIM_Visibility〉,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45.5x53cm

"하나의 생명을 낳는 것은 하나의 죽음을 낳는 것과 같다."

어릴 적의 깨달음이었다고 심모비(SIM_Moby)는 말한다. 이 한 문장에서 출발해 작가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세웠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의 자리. 생과 사가 결정되기 이전의 장소. 이름은 SIM_Purgatory, 연옥.

연옥, 소멸이 없는 세계

심모비에게 연옥은 형이상학의 은유가 아니다. '현실 연계형 내세'라는 구체적 세계다. 현세의 개념과 이미지들을 모티프로 끌어와, 괴수적인 형태와 전생의 상상을 융합해 만든 2D 풍경. 물리적 재료로 먼저 스케치를 한다. 그다음, 디지털에서 완성한다. 디지털에서는 소멸이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이미지는 다시 물성으로 돌아온다. 유화나 아크릴로 채색된 작품인지, 디지털로 만들어 인쇄한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환영을 감상자에게 건넨다. 물리 → 디지털 → 인쇄 → 콜라주 → 다시 물리. 작가는 이 과정을 **'회화의 윤회'**라 부른다.

메가바이트의 침식 윤회

심모비, 〈9407 SIM_Visibility〉, 2025
심모비, 〈9407 SIM_Visibility〉, 2025
〈9407 SIM_Visibility〉 — 불투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진실, 그럼에도 보이는 것들

심모비가 자신의 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말은 '메가바이트의 침식 윤회'다. 디지털에서 여러 차례 침식과 부식을 반복해 만드는 질감. 픽셀 위에 독특한 밀도감을 얹는 기술. 이 과정을 거치면 화면에는 1990년대 VHS 테이프 특유의 노이즈 질감이 올라온다. 2D 디지털 매체, JPG라는 기록형식이 도달할 수 있는 미감을 작가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다음, 고밀도 2D 이미지들은 다양한 물성 위에 인쇄되어 다시 해체된다. 오려낸 조각들은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연옥의 불꽃' — 천국에 들어가기 전 죄를 태우는 정화의 불꽃 — 의 형상으로 혼돈처럼 뒤섞인다. 아크릴 스틱으로 마감된 표면은 고밀도 콜라주 부분, 접착제, 아크릴 스틱이 함께 만들어내는 독특한 결을 전한다.

탄생(스케치) → 죽음(디지털화) → 다시 탄생(인쇄) → 죽음(콜라주) → 다시 탄생. 연옥에서 생사는 순환한다.

도요타에서, 나고야에서, 서울에서

심모비의 활동 반경은 넓다. 2021년 2월 일본 나고야 Gallery Blanka를 시작으로, 3월 도요타 RAFU Gallery Keyaki, 5월 서울 Bincan, 9월 다시 나고야. 2022년 8월에는 도요타시립미술관 갤러리에서 디지털 아티스트 최초 개인전을 열었다. 2023년에는 나고야(Gallery Sou, 미츠코시백화점 Arte Casa), 산티아고(칠레 Tapiial Virtual Gallery), 서울(MISAJANG, NOWHERE)을 가로질렀다.

2023년, 이탈리아 피렌체 컨템퍼러리 갤러리 《50 Artists To Watch》에 선정됐다. 2024년 일본 카메야마 트리엔날레 출전작가. 2022년에는 대종상영화제·춘사국제영화제 홍보대사를 맡았다.

불투명한 진실

씨앗페 2026에 출품한 여섯 점은 모두 SIM_Visibility / SIM_Memory 연작이다. 작가는 최근 작품 옆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불투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진실, 그럼에도 보이는 것들에 관하여"

연옥을 포함한 내세는 현세의 인간에게 미래의 세계다. 다가올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고, 설령 그 미래가 현재로 도착한 순간조차 인간은 편린만 인지할 수 있다. 심모비의 작업이 '디지털 침식'으로 질감을 흐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벽한 선명함은 진실에 가닿지 못한다. 흐린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연옥의 연대

심모비는 씨앗페에 여섯 점을 내놓았다.

심모비, 〈9409 SIM_Visibility〉,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45.5x53cm (판매됨)
심모비, 〈9409 SIM_Visibility〉,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45.5x53cm (판매됨)
심모비, 〈9406 SIM_Visibility〉, 2025,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 45.5x53cm (판매됨)
심모비, 〈9406 SIM_Visibility〉, 2025,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 45.5x53cm (판매됨)
심모비, 〈9505 SIM_Memory〉,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45.5x37.9cm
심모비, 〈9505 SIM_Memory〉,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45.5x37.9cm
심모비, 〈9410 SIM_Visibility〉, 2026,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10F (45.5 x 53cm)
심모비, 〈9410 SIM_Visibility〉, 2026, 믹스미디어 이후 아크릴 스틱 콜라주, 아크릴 채색, 10F (45.5 x 53cm)

그중 세 점은 이미 판매됐다.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이 만드는 상호부조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연옥은 소멸이 없는 유토피아다. 심모비의 작업이 현세의 시간 속에서 상호부조 기금으로 순환할 때, 그 순환은 작가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끝나지 않는 윤회. 다만 이번 윤회의 끝에서 누군가는 빚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온다.

천국과 지옥 사이

천국에 들어서기 전 연옥의 불꽃이 죄를 태운다고 가톨릭은 가르친다.

심모비의 캔버스 위에서도 불꽃이 뒤섞인다. 다만 그 불꽃은 무엇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불꽃이다. 픽셀의 침식을 거쳐도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죽음을 거쳐도 다시 태어나는 형상이 있다.

씨앗페 2026도 그런 불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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