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마이스터슐러 출신의 작가. 이지은은 끌로 나무를 파내듯이 붓으로 색을 비워낸다.

이지은의 화면 앞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끌을 연마석에 갈듯이 붓에 적정량의 물감과 물을 조절하여 묻힌다. 이 과정은 중요하다. 물감이 적으면 원을 그리는 과정에서 물감이 모자라 메마른 원이 되고, 물이 너무 많으면 물감이 흘러내린다."
회화를 '그리는 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끌을 연마석에 가는 일'로 설명한다. 이지은의 작업은 조각가가 나무판을 파내듯 색을 비워내는 일이다. 작품 이름도 그래서 Hollowed다. 속을 파낸, 비워낸.
서울-브레멘-뒤셀도르프
1984년 한국에서 태어난 이지은은 2007년 국민대학교 입체미술전공을 학사로 졸업하고, 2009년 같은 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독일로 건너갔다.
2011년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 대상(Hochschulprize)을 수상했고, 2015년 같은 학교 순수미술전공 9학기를 수료했다. 2017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디플롬 학위를 받고 마이스터슐러(Meisterschüler)를 수료했다. 지도교수는 프란카 훼렌쉐메이어(Franka Hörnschemeyer). 마이스터슐러는 디플롬 이후 지도교수 아래서 심화 연구를 거친 작가에게 주어지는 독일 미술학교 특유의 자격이다. (디플롬 학위는 한국에서 석사로 인정된다.)
독일의 갤러리 지도
2018년 이후 그녀의 전시 기록은 독일 갤러리 이름들로 빼곡하다.
쾰른 비젠박흐(Biesenbach) 갤러리, 뮌헨 크비텐바움(Quittenbaum) 갤러리, 프랑크푸르트/콘스탄츠 락헨만 아트(Lachenmann-Art) 갤러리. 《Luxembourg Art Week》(2021), 《Sculptural. Painting》(2021), 《Trialogue — Aspects of Abstraction》(2023), 《Female Perspectives》(2023), 《Achromatic》(2024), 《From Abstract To Nature》(2024). 독일어권의 추상·조각·회화 현장 안에서 꾸준히 호출되는 이름이다.
2019년에는 쾰른 비젠박흐 갤러리에서 《reversed》, 2023년에는 뒤셀도르프 아트(duesseldorf-art)에서 《art-hoc solo exhibition》, 같은 해 뮌헨 크비텐바움 갤러리에서 《structure》로 잇달아 개인전을 열었다.
다시 서울로
2025년 11월, 이지은은 서울 아트스페이스 엣에서 개인전 《Hollowed Colors》를 열었다. 10년 넘게 독일에서 축적한 작업이 한국 관객 앞에 다시 놓이는 자리. 2026년 5월에는 김포 CICA Museum에서 또 한 번의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한국의 공모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2025년 이랜드문화재단 16기 공모전시(답십리아트랩), 대한민국모던아트대상전·신사임당 미술대전 입선. 국경을 오가며 새로운 관객과 계속 만나는 중이다.
하는 것 혹은 한 것

이지은은 자신의 Hollowed 시리즈 옆에 이렇게 적어둔다.
"Doing or done / Machen oder gemacht / 하는 것 혹은 한 것"
세 언어로 반복되는 같은 질문. 지금 '하는 일'은 이미 '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끌이 연마석을 스치는 순간은 과정이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것은 흔적이 된다. 작가는 "힘을 주어 끌로 나무의 표면을 나뭇잎처럼" 파내는 동작을, 붓과 색으로 번역했다.
예전에는 캔버스 위에 그리드를 그리고 시작했다. 이제는 그리드를 그리지 않는다. "어느 시점이 오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작가는 덧붙인다. 규칙이 필요하던 때와 그것을 내려놓는 때 사이에, 오늘의 작업이 있다.
씨앗페의 두 점
이지은은 씨앗페에 두 점을 내놓았다.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이 만드는 상호부조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회화가 색을 '더하는 일'이라면, 씨앗페는 생계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이지은의 작업은 '비워내는 일'을 통해 다른 색을 보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뺄셈으로 드러나는 밀도, 비움으로 쌓이는 선명함. 기금도 그런 방식으로 일한다. 한 점의 작품 값이 비워진 자리를 메우고, 그 메움이 다른 작가의 다음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서울과 뒤셀도르프 사이에서
이지은은 두 도시 사이의 시간대에서 살아간다. 서울의 아침이 뒤셀도르프의 저녁이다. 이쪽에서 '하는 일(Doing)'이 저쪽에서는 이미 '한 일(done, gemacht)'이 된다.
그녀의 Hollowed 시리즈가 그 시차를 한 장의 화면 위에 포개어 둔다. 2026년 봄, 김포 CICA에서 관객이 그 시차를 직접 만질 수 있게 된다.
이지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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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페
발행 2026-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