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색의 거장이 연필로 남긴 가장 이른 작품들. 전쟁이 그 이전의 모든 것을 태웠고, 이 연필화들이 실물로 현존하는 최초의 박생광이다.2026년 5월 20일 ~ 6월 8일갤러리 PEG · 서울특별시 은평구 통일로 870 M타워 6층오전 11시 ~ 오후 8시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드로잉(drawing, 소묘)은 시각예술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영국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는 그 본질을 한 줄로 적었다 — “모든 예술적 진술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것.” 선이 종이를 가로지르고, 그 순간 작가의 손이 곧 작품이 된다. 채색이라는 두꺼운 절차가 없다. 보이는 것은 작가가 본 순간 그대로다.
미술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드로잉은 회화의 예비 단계였다. 리허설, 채색에 덮이는 골격. 그러다 레오나르도를 기점으로 드로잉은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하는” 자율적 예술이 되었다. 1976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기념비적 전시 〈Drawing Now〉에서 드로잉을 “주요하고 독립적인 표현 수단”으로 선언한 것은 그 흐름의 정점이다.
한국 전통도 다른 길로 같은 결론에 닿았다. 필묵(筆墨)의 자리에서 선 한 줄은 작가의 호흡과 기질, 세계를 보는 시선을 그대로 싣는다. 사의(寫意)— “뜻을 그린다”는 동양화의 화법은 닮음이 아니라 선 뒤의 마음을 본다. 드로잉전은, 이 척도로 보자면, 한 작가의 집에서 가장 사적인 방이다.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20년 일본 교토로 건너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신일본화(新日本畵)의 거장 다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와 무라카미 가가쿠(村上華岳)에게 사사했다. 이후 수십 년, 한국 화단은 그를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분류했다.
1977년, 그는 일본에서의 두 번째 시기를 마감하고 영구 귀국한다. 일흔셋의 그가 스스로의 화풍을 뒤집은 자리에서 오방색 — 한국 전통의 다섯 색, 청·적·황·백·흑이 솟구쳐 올라왔다. 무속의 굿판, 불교의 도상, 민속, 그리고 민족의 역사 — 전봉준, 무당, 단군, 명성황후가 그의 화폭에 들어섰다.
마지막 8년은 그의 진정한 황금기였다. 1985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 특별전에서 비평가들은 그를 “한국의 피카소”로 환영했다. 같은 해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백여 점의 만년 채색화, 그리고 생애를 가로지른 연필화들은 이제 한국 채색화가 새로운 지반을 얻은 순간으로 다시 읽힌다.
무당과 굿판, 부적의 도상 — 신령한 기운을 강렬한 색면으로 옮긴 박생광 후기 회화의 정점.
전봉준·명성황후·이순신·논개 — 한국 역사 속 인물을 의례적 채색으로 기념한 대작 시리즈.
민화·탱화·단청 문양 — 전국 절집을 다니며 채집한 한국 토속 도상을 현대 회화로 재구축했다.
박생광이라는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색이 따라붙었다. 만년 채색화의 깊은 적색과 군청이 그를 본 모든 이의 기억을 채운다. 그러나 연필화들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담는다. 1950년 전쟁은 그가 일본에서 제작·보관하던 작품까지 포함해 그 이전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잿더미 위에서 박생광은 다시 시작했다 — 종이에 연필로, 폐허가 된 주위를 그리는 것으로. 그 연필화들이 실물로 남아 있는 박생광의 가장 이른 그림들이다.
2023년 3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위대한 만남 — 박생광·박래현〉에서 박생광의 연필화 100점이 처음 한자리에 공개됐다. 이번 전시는 그 흐름 위에서, 종이에 연필 25×18cm 안팎의 작품들을 자율적 완성작으로 다시 모은다.
그 연필 선들의 여정은 1950년 폐허가 된 진주에서 시작한다. 30년의 혐의를 감내하며 다시 살아난 풍경들을 그리고, 한 번 더 일본을 찾아 작업에 매진하다가, 마침내 1979년 불교 발상지 인도에 닿는다. 연필 하나로 관통한 생애의 궤적이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박생광이 살던 집은 물론, 일본에서 힘들게 가져와 보관하던 작품들까지 모두 잿더미가 됐다. 도쿄 폭격을 이미 겪은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폐허가 된 진주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강 건너에서 진주성 쪽을 바라보며 그린 연필화에는 그 유명한 촉석루가 없다. 폭격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촉석루는 그 후에 복원한 것이다. 이 연필화들은 그 파괴의 증언인 동시에, 박생광이 실물로 남긴 가장 이른 작품들이다.
폐허를 그리던 그 세월에도, 또 하나의 무게가 그를 눌렀다. 그 연원은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 동학교도이자, 농민군의 우두머리 전봉준의 호위 부대에 속했다가 마지막에 살아남은 사람. 그 아들이 적국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유학생과 달리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며 오래 머물렀다 — 후원으로 집을 짓고, 심지어 극렬 반일인사였던 아버지까지 만년을 일본에서 보내다 눈을 감았다. 광복 후 30년 동안 박생광은 이른바 ‘일본색’ 혐의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의 연필화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다.
혐의를 감내하는 긴 시간 동안에도, 박생광의 연필은 멈추지 않았다. 진주를 넘어, 더 넓은 곳으로 시선이 열려갔다. 제주 한라산 백록담을 담은 연필화들이 있다 — 이 중 몇 점은 훗날 채색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부산 해운대의 풍경을 그린 것도 남아 있다. 상당히 많은 연필화들은 장소와 그린 때를 알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 불확실성 자체가 이 시기 그림들의 성격을 말해준다 — 기록이 아닌 눈의 운동, 그가 살아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그려낸 풍경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내 더 먼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사귀었던 동료 화가들은 전후 복구된 경제를 바탕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이 오랜 벗 박생광을 기억하고 불렀다. 마침 막내 딸이 도쿄대학교 약학과 국비장학생으로 초청을 받아 일본에 살게 됐다. 딸의 유학 생활을 돕는 동시에 자신도 제작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그 시절을 뒤돌아보며 박생광은 회상했다 — “수십 년 만에 다시 의욕에 가득 찼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작품 활동에 매진한 수년이었다.”
1979년, 75세의 박생광은 노익장을 과시하듯 놀라운 변화를 보이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성취 위에서 그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인도를 향했다. 여정은 길었다 — 진주의 작은 학교에서 그림 솜씨를 알아본 일본인 교사의 권유로 교토 유학이 시작됐고, 일본에서는 ‘아시아문명의 박물관’이라고 한 곳에서 중국과 한국 미술의 흔적을 찾았으며, 후원자의 도움으로 중국 여행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문명의 또 다른 축,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 발을 내딛었다. 인도에서 그는 발디디는 곳마다 신들린 듯 연필화를 그렸다.
1950년 폐허의 진주에서 1979년 인도의 성지까지, 연필은 그를 관통한 단 하나의 끊어지지 않은 선이었다. 만년 채색화가 그를 세계에 알렸다면, 연필화는 그 색이 오기 전에도, 그 색이 완성된 뒤에도 끝까지 그와 함께한 언어였다. 이번 전시는 그 언어를, 그 자체로 듣는 자리다.
총 38점의 드로잉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026. 5. 20 (수)— 6. 8 (월)
갤러리 PEG
서울특별시 은평구 통일로 870 M타워 6층
오전 11시 ~ 오후 8시
무료 관람